김누누

이름 부르기

길게 설명해야 하는 상태나 개념 같은 것에 이름을 붙인다. 최근에는 집과 악귀 필터라는 이름을 지었다. 집은 나가서 사람과 관계를 맺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 내게는 외출이며 아무리 즐겁고 행복해도 결국에는 혼자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름이다. 악귀 필터는 상대가 나를 싫어할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그에 따라 상대의 행동을 해석해버리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름을 붙이고 나면 그것을 부를 수 있다. 결국 나는 혼자가 될 것이라는 감각은 부를 수 없으나 그것에 집이라 이름 붙이면 부를 수 있다. 상대가 나를 싫어할 것이라 지레짐작하는 감정은 부를 수 없으나 악귀 필터라 붙이면 부를 수 있다. ‘집에 갈 때가 되었다’, ‘악귀 필터 이 자식이 자꾸 내 생각을 망쳐’ 처럼. 그러한 상태 자체를 부를 수 있고 부를 수 있게 되면 그것을 어림 가능한 크기로 만들 수 있다. 어림 가능한 크기가 되면 농담 거리로 쓸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신에게 이름 붙이는 순간 신과 관계 맺기가 가능해지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우리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장 먼저 누누라는 이름보다 보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다는 말을 한다. 누누는 내가 지어낸 이름이지만 보섭은 내게 주어진 이름이다. 누누는 보섭이 가진 좋은 점들을 추출해서 만들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누누는 유머러스하다는 말을 듣고 여유로워 보인다는 말을 들으며 온화하고 친절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보섭은 유머러스하다는 말을 듣고 여유로워 보인다는 말을 들으며 온화하고 친절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거기에 더해 보섭은 생각이 많고 과민하며 자기 검열이 심하고 과도하게 책임지려는 경향이 있다. 명확하지 못한 것을 명확하지 못한 채로 두는 것을 어려워 한다. 누누는 시인이지만 보섭은 시인은 아니다. 누누가 시를 쓸 수 있게 생활을 유지하는 인간이다. 내가 보섭이라 불리는 게 좋다는 말을 하는 건 더 넓은 나, 구석구석까지의 나를 우리 관계에 놔달라는 요청이다.

누누도 나고 보섭도 나이지만 누누가 아닌 보섭으로 불릴 때 나는 시인이 아닌 그냥 한 인간으로 불리는 기분이 든다. 내가 시인이 아닌 모든 곳에서 나는 보섭으로 불린다. 내 하루 중 대부분은 시인이 아닌 시간이 차지한다. 나는 보섭이라 불리며 그 거의 대부분을 시간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보이고 싶다. 그러나 나를 누누라고 부른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에게 유머러스하고 여유롭고 온화하고 친절한 시인이 될 것이다.